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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을 사회학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정원은 어떻게 우리 마음과 관계, 그리고 사회의 구조에 영향을 미치기에, 그 안에 들어서는 순간 긴장이 풀리고 숨이 고르게 될까?”
이 글에서는 심리학이 아닌 사회학적 시선으로 정원을 바라보며, 도시·공동체·문화·권력·일상이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로 정원의 평화가 어디에서 오는지 살펴본다.

정원 사회학적으로 정원은 ‘속도’를 바꾸는 사회적 장치다
정원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변하는 것은 몸의 리듬이다.
도시의 길을 걸을 때와 정원 산책로를 걸을 때, 발걸음의 속도는 거의 자동으로 달라진다.
이 차이는 단순한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시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도시 거리는 ‘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신호등, 출근 시간, 마감, 배달 시간 등 모든 것이 시간을 쪼개어 쓴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반대로 정원은 서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라는 사회적 신호를 끊임없이 보낸다.
나무와 풀, 흙길은 하이힐·정장보다는 편한 신체 움직임을 허용한다.
벤치, 그늘, 작은 연못 같은 요소는 여기서는 잠시 멈춰도 괜찮다고 말하는 디자인이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정원은 도시의 시간 규율에서 잠시 벗어나도록 허락하는 ‘완충지대’다.
우리가 평화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그 안에서 사회가 요구하던 속도와 태도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의 ‘하이 라인 파크(High Line Park)’는 폐철로를 정원 산책로로 바꾼 대표적인 사례다.
도시의 빌딩 사이, 차량 소음이 가득한 거리 위로 녹색 길이 나 있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뛰어다니기보다, 카페에 앉거나 의자에 누워 하늘을 본다.
흥미로운 점은, 이곳을 걷는 사람들의 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진다는 것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거리 바닥에 있을 때와 하이 라인 위에 있을 때의 동선과 표정이 달라진다.
정원은 이렇게 속도를 늦추는 사회적 장치로 작동하고, 그 느려짐이 곧 평화감으로 이어진다.
정원 사회학적으로 정원은 ‘관계’를 다시 느끼게 하는 공간이다
정원에 있으면 혼자 있어도 이상하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부담스럽지 않다.
이 애매하지만 편안한 상태가 바로 정원이 주는 관계의 평화다.
도시의 카페, 지하철, 사무실에서는 늘 ‘적절한 거리 두기’를 계산해야 한다.
눈을 마주칠지 말지, 말을 걸지 말지, 자리 간격을 어떻게 둘지 등 미세한 긴장이 지속된다.
정원에서는 이 긴장이 상당히 완화된다.
나무와 식물이 공간을 적당히 가려주며 시선을 분산시킨다.
시선이 사람에게만 향하지 않고, 풀·꽃·물·하늘로 퍼져 나간다.
이때 인간관계의 압력이 줄어들고, 대신 함께 있음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정원은 인간들만이 아닌 다른 존재들과 관계 맺는 경험을 제공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직접적으로 마주 보게 하지 않고, 식물과 풍경을 사이에 둔 ‘간접적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에 조성된 공동체 정원을 떠올려 보자.
여기서는 이웃들이 함께 텃밭을 가꾸지만, 꼭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괜찮다.
누군가는 호미질을 하고, 누군가는 물을 주고, 아이들은 흙을 만지며 놀고, 어르신들은 그 모습을 단지 바라보고 있다.
말이 없어도 '같이 있는 느낌'이 만들어진다.
이 느슨한 연대는 현대 도시에서 점점 사라진 감각이다.
정원은 다시금 나와 타인이 ‘공간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부드럽게 실감하게 하는 장소이며,
이 경험이 사람을 안정시키고 평화롭게 만든다.
정원 사회학적으로 정원은 ‘통제 가능한 세계’라는 안도감을 준다
현대 사회는 예측 불가능성과 불안이 크다.
경제, 정치, 기후, 팬데믹 등 어디서 무엇이 터질지 모른다는 감각이 일상화되어 있다.
이때 정원은 '내가 손댈 수 있는 작은 세계'로 등장한다.
화분 하나, 텃밭 한 구획, 작은 정원 한 모서리는 전부 다루기 힘든 세계 속에서 내가 조금은 통제할 수 있는 우주다.
씨앗을 심으면 일정 기간 후에 싹이 난다.
물을 주면 잎이 탱탱해지고, 잊으면 시들어간다.
가지치기를 하면 모양이 달라지고, 비료를 주면 더 잘 자란다.
물론 자연은 완전히 통제 불가능하지만, 정원은 '돌봄과 변화의 인과관계'를 비교적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경험은 “내가 하는 행동이 세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감각을 회복시킨다.
사회학적 용어로 말하면, 정원 가꾸기는 행위자성(agency)을 회복하는 실천이다.
1인 가구가 많은 도시에서 반려식물 열풍이 일어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유리병 속 작은 수경식물 하나가, 고립된 삶 속에서 '내가 돌보고 있는 작은 세계'가 된다.
출근 전과 후에 식물을 확인하는 루틴은, 하루를 정리하는 의식이자
“내가 무언가를 지키고 있다”는 정체성을 만들어 준다.
이때 정원(혹은 화분)은 단지 인테리어가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사회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심리적·사회적 장치로 기능한다.
그 안도감이 곧 평화감의 중요한 부분이다.
정원 사회학적으로 정원은 ‘불필요한 경쟁’을 잠시 멈추게 한다
도시는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의 무대다.
학력, 소득, 외모, 패션, 업무 성과, SNS 팔로워 수까지 거의 모든 것이 순위 매겨진다.
하지만 정원에 들어가면, 그런 비교의 기준이 상당히 흐릿해진다.
꽃이 '더 잘난' 꽃, '못난' 꽃으로 나뉘지 않는다.
나무도 '성공한 나무', '실패한 나무' 등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사람도 정원에서는 '직책'이나 '스펙'없이 그저 한 사람의 방문자가 된다.
사회학적으로 표현하면, 정원은 도시 사회의 지배적 가치(성과·경쟁·속도)를 상대화하는 공간이다.
그 안에서는 '잘한다/못한다'보다는 '같이 있다/함께 본다'라는 경험이 중요해진다.
어떤 회사의 옥상정원에서 시작된 가드닝 모임을 생각해 보자.
평소에는 직급과 부서에 따라 말투와 행동을 다르게 해야 하는 직원들이,
옥상정원에 모이면 함께 흙을 뒤집고 모종을 나눈다.
여기서는 부장·대리·인턴이 아니라,
“토마토 담당”, “허브 담당”, “잡초 제거 담당” 정도로 불린다.
농담과 웃음이 오가고, 실수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모임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평화로움은 단지 자연 때문만이 아니라,
직급과 경쟁이 잠시 옅어지는 사회적 상황 덕분이다.
정원은 그런 의미에서 위계와 경쟁의 강도를 낮추는 완충 공간이며,
그 덕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정원 사회학적으로 정원은 ‘기억과 이야기’를 안전하게 담는 곳이다
정원에는 시간이 쌓인다.
누군가 심어 둔 나무가 수십 년을 자라기도 하고,
이사 간 사람의 화분이 다른 사람 손에서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이렇게 정원은 개인과 공동체의 기억을 담아두는 장소가 된다.
어떤 나무는 '할아버지가 심어둔 감나무',
어떤 화단은 '아이와 함께 처음 만든 화단',
어떤 벤치는 '힘들 때 자주 앉아 울던 자리'로 기억된다.
이 개인적·공동체적 서사가 쌓인 정원은
'나의 시간, 우리의 시간'을 조용히 품어주는 장소가 된다.
안전하게 기억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큰 위로를 준다.
유럽과 북미에서는 슬픔과 상실을 정원에 담는 추모정원(Memorial Garden)의 사례가 많다.
재난, 사고, 전쟁, 개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작은 정원을 만들고,
이곳에 이름이 새겨진 나무나 꽃을 심는다.
사람들은 그 정원에 와서 말을 하지 않아도,
'여기를 찾아온 사람들은 나와 같은 슬픔을 안고 있다'는 느낌을 공유한다.
이 감정의 공유가 곧 치유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니까 정원은 단지 예쁜 곳이 아니라,
고통과 상실을 안전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사회적 그릇이다.
이런 공간에 서 있을 때, 사람들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감각과 함께,
나와 타인의 상처가 함께 기억된다는 사실에서 묘한 평화를 경험한다.
정원 사회학적으로 정원은 ‘인간 중심’에서 우리를 한 걸음 물러서게 한다
사회학과 환경인문학에서는 점점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난 사회 상상'이 중요해지고 있다.
정원은 이 상상을 가장 일상적인 수준에서 연습하는 공간이다.
정원에 있을 때,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이 나무는 나보다 오래 살 수도 있겠구나.”
“이 텃밭엔 벌과 지렁이, 미생물도 함께 살고 있겠지.”
“비가 많이 오면 식물이 힘들어하겠네.”
이 순간, 인간은 사회의 중심에서 살짝 물러나
다른 생명들과 세계를 함께 구성하는 존재로 위치가 재조정된다.
이 경험이 주는 신기한 평화감이 있다.
현대 사회의 많은 불안은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려 있다”는 압박에서 온다.
정원은 조용히 이렇게 말해준다.
“너 혼자 다 책임지지 않아도 돼.
이 세계는 원래부터 많은 존재들이 함께 만들어 온 곳이야.”
이 관점 전환은
자기 과잉 책임감과 부담에서 조금 벗어나게 해주는 사회적·정서적 효과를 낳는다.
정원 사회학적으로 정원은 ‘다른 삶도 가능하다’는 상상을 열어준다
마지막으로, 정원이 주는 평화로움의 배경에는
'지금의 삶만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가능성의 감각이 있다.
도시에서 하루를 보내고 정원에 들어설 때, 사람들은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언젠가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
“일주일에 한 번은 이런 데 와야겠다.”
“나도 나만의 작은 정원을 가져보고 싶다.”
이 상상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삶의 다른 구조를 꿈꿀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상상력이다.
세계 곳곳에서 ‘정원도시’를 표방하는 움직임은
단순한 도시 미관 개선이 아니라,
도시가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한 집단적 상상이다.
자동차 도로를 줄이고 정원을 늘린 도시,
학교마다 작은 숲과 텃밭이 있는 도시,
아파트 옥상마다 공동 정원이 있는 도시를 상상하는 것이다.
이 상상은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더 나은 삶의 방식이 가능하다”는 희망으로 이어진다.
희망은 곧 평화감을 낳는다.
정원은 그래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조용히 보여주는 사회적 실험실이다.
맺음말
정원은 우연히 우리를 평화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 평화는
속도를 늦추고,
관계의 방식을 바꾸고,
통제 가능성을 회복시키고,
경쟁을 잠시 멈추게 하고,
기억과 상처를 담아두고,
인간 중심에서 한 걸음 물러서게 하고,
다른 삶을 상상하게 만드는
복합적인 사회적 장치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정원을 사회학의 언어로 다시 말하면,
정원은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 몸과 감각으로 먼저 말해주는 공간이다.
다음에 정원에 앉아 있을 때,
“왜 이렇게 평화롭지?”라고 느껴진다면,
그건 아마도 당신이 잠시 다른 사회, 다른 관계, 다른 시간 속에 들어섰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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