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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원을 가질 조건이 없었다
한국 사회에서 정원이 늦게 확산된 이유를 흔히 “아파트 문화 때문”, “땅이 좁아서”, “정원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 등으로 설명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 정원이 늦게 확산된 이유는 문화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정원을 가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오랫동안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원은 단순히 흙과 식물이 있는 공간이 아니다. 정원은 여유, 잉여, 안정, 시간, 비생산성이라는 요소가 동시에 충족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공간이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이 조건들을 허락하지 않는 구조 속에 놓여 있었다.

생존 중심 사회에서 정원은 사치였다
한국 근현대사의 핵심 키워드는 생존이었다. 식민지 시기, 전쟁, 분단, 산업화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한국 사회에서 자연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자원이었다. 땅은 경작해야 할 대상이었고, 식물은 먹을 수 있거나 팔 수 있어야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정원은 이해하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생산하지 않는 땅, 수확을 전제로 하지 않는 식물, 시간을 들여 가꾸되 경제적 성과를 내지 않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려웠다. 정원은 여유의 상징이었고, 여유는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은 상태였다.
유교적 노동 윤리와 정원의 충돌
한국 사회의 문화적 토대인 유교적 가치관 역시 정원의 확산을 지연시킨 요인 중 하나다. 유교 사회에서 이상적인 인간은 근면하고 절제된 존재였다. 놀고 있는 모습, 생산하지 않는 시간, 자연을 감상하는 행위는 미덕으로 평가받기 어려웠다.
물론 전통 사회에도 후원과 별서정원은 존재했다. 그러나 이는 극소수 지배층의 공간이었고, 사회 전체로 확산되지 않았다. 대다수의 삶에서 정원은 노동에서 벗어난 공간이 아니라, 노동과 동일시되는 자연이었다. 이 점에서 한국의 정원 전통은 단절된 채 계승되었다.
산업화와 압축 성장: 정원이 들어설 틈이 없었다
한국의 산업화는 매우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도시 계획의 우선순위는 주거 공급, 산업 시설, 교통 인프라였다. 녹지는 남는 공간이 있을 때 고려되는 요소였고, 정원은 정책의 대상이 아니었다.
특히 주거 형태의 변화는 결정적이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한국 사회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정원을 사적 공간에서 제거했다. 마당은 사라졌고, 흙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요소가 되었다. 이 시기 정원은 불필요한 사치이자, 비효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공공정원의 부재와 자연의 국가 소유화
서구 사회에서 정원이 확산된 중요한 계기 중 하나는 공공공원의 등장이다. 시민은 사적 정원이 없어도 공공정원을 통해 자연을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반면 한국에서는 자연이 공공의 삶 속으로 들어오기보다는, 국가 관리 영역으로 분리되는 경향이 강했다. 산과 강은 보호 대상이었지만,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공간은 아니었다. 자연은 가까이 두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거나 개발하는 대상이었다. 이 구조 속에서 정원은 생활 문화로 자리 잡기 어려웠다.
여유의 불균등과 정원의 계층화
정원은 단순히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원을 가꾸기 위해서는 일정한 여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여유는 오랫동안 불균등하게 분배되었다.
장시간 노동, 경쟁 중심 사회 구조 속에서 다수의 사람에게 정원은 꿈속의 공간에 가까웠다. 정원은 현실의 생활공간이 아니라, 은퇴 후의 로망이나 성공의 상징으로 소비되었다. 이는 정원을 일상의 문화가 아니라, 도달해야 할 상태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최근에서야 정원이 확산되기 시작한 이유
그렇다면 왜 최근 들어 정원이 주목받기 시작했을까. 이는 한국 사회가 마침내 정원을 허락할 만큼 조건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 생존 중심 사회에서 삶의 질 중심 사회로의 전환
- 장시간 노동에 대한 문제 제기
- 기후 위기와 환경 감수성의 확산
- 은퇴 세대와 중장년층의 여유 증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정원은 사치가 아니라, 회복과 돌봄의 공간으로 재인식되기 시작했다. 정원은 더 이상 생산을 거부하는 공간이 아니라, 삶을 유지하기 위한 인프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전히 남아 있는 구조적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정원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토지 가격, 주거 구조, 노동 시간, 제도적 지원은 여전히 정원을 대중화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많은 정원 정책이 이벤트성, 전시형, 관광 중심으로 기획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원이 일상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사회 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정원은 개인의 노력으로만 가질 수 있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 정원이 늦게 온 사회가 던지는 질문
한국 사회에서 정원이 늦게 확산된 이유는 명확하다. 정원은 여유의 결과이며,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구조 속에 있었다.
이제 정원은 막 도착했다. 그러나 그 도착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정원이 특정 계층의 취향으로 머물 것인지, 모두의 생활 인프라로 확장될 것인지는 앞으로의 선택에 달려 있다.
정원은 자연을 가꾸는 공간이 아니다. 정원은 사회가 여유를 어떻게 배분하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한국 사회에서 정원이 늦게 확산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앞으로 정원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출발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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