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인스타그램 속 정원이 불편한 이유

📑 목차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인스타그램 속 정원은 너무 완성되어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마주치는 정원들은 하나같이 완성된 상태로 존재한다. 잡초는 보이지 않고, 식물은 늘 제철이며, 색감은 조율되어 있고, 햇빛은 항상 이상적인 각도로 들어온다. 이 정원들에는 시작도 없고, 중간도 없으며,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최적 상태’만 있다. 정원은 원래 완성될 수 없는 공간이다. 식물은 자라고 시들며, 계절에 따라 무너지고 다시 채워진다. 그런데 인스타그램 속 정원은 이 불안정성을 제거한 채, 마치 정원이 언제나 통제 가능하고 유지 가능한 대상인 것처럼 보여준다.

    이 완성도는 단순한 미적 문제를 넘어선다. 완성된 정원 이미지는 정원을 시간의 흐름에서 분리한다. 기다림, 실패, 회복이라는 정원의 핵심 경험이 삭제되면서, 정원은 살아 있는 장소가 아니라 전시된 결과물이 된다. 실제 정원을 가꾸는 사람일수록 이 이미지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안다. 정원에는 항상 어긋남이 있고, 계획되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인스타그램 속 정원은 그 어긋남을 허용하지 않으며, 정원을 하나의 이상적 상태로 고정한다. 이때 느끼는 불편함은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정원의 시간성이 지워졌다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정원 사회학의 시선으로 본 정원 인플루언서, 왜 여성 중심인가
    정원 사회학의 시선으로 본 정원 인플루언서, 왜 여성 중심인가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인스타그램 속 정원은 ‘삶의 과정’이 아니라 ‘삶의 결과’처럼 보인다

    인스타그램 속 정원은 반복적으로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정원은 잘 정돈된 삶의 결과이며, 이 공간을 가진 사람은 이미 안정된 상태에 도달했다는 암시다. 정원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이 잘 관리되고 있다는 증거물로 기능한다. 이때 정원은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라, 성취를 배경으로 설명하는 장치가 된다.

    문제는 이 결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원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 노동, 비용, 공간은 화면 밖으로 밀려난다. 그 결과 정원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도달해야 할 삶의 상태처럼 인식된다. 정원은 위로가 되기보다는 비교의 대상이 되고, 사람들은 자신이 부족해서 이 풍경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느끼게 된다. 이 불편함은 개인의 열등감 때문이 아니다. 정원이 삶의 맥락에서 분리되어, 결과만으로 소비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구조적 감정이다. 인스타그램 속 정원은 삶을 견디는 공간이 아니라, 삶이 잘 정리되었음을 보여주는 표식이 된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인스타그램 속 정원은 노동을 지운다

    정원은 본질적으로 노동의 공간이다. 물 주기, 가지치기, 병해충 관리, 실패 이후의 재시도까지 정원은 끊임없는 개입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스타그램 속 정원에는 노동의 흔적이 없다. 손은 늘 깨끗하고, 옷은 더럽혀지지 않으며, 땀과 피로는 보이지 않는다. 정원은 마치 저절로 유지되는 풍경처럼 제시된다.

    이 노동의 삭제는 단순한 미화가 아니다. 노동이 보이지 않는 정원은 돌봄과 책임의 윤리를 함께 지운다. 정원은 누군가의 시간과 몸을 요구하는 공간이 아니라, 소비 가능한 이미지가 된다. 특히 실제로 정원을 가꾸어본 사람에게 이 이미지는 더 불편하다. 그들은 안다. 이 풍경이 유지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와 반복이 있었는지를. 인스타그램 속 정원은 노동을 지움으로써, 정원을 다시 특권의 영역으로 돌려보낸다. 이는 정원이 지닌 윤리적 가치, 즉 생명을 돌보고 관계를 유지하는 경험을 약화시킨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인스타그램 속 정원은 계층 감각을 은밀하게 강화한다

    겉으로 보면 인스타그램 속 정원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정원들이 전제하는 조건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정원을 유지할 시간, 공간, 경제적 안정은 특정한 삶의 구조를 필요로 한다. 인스타그램은 이 조건을 삭제한 채 결과만을 보여준다. 그 결과 정원은 자연이 아니라, 중산층적 안정과 여유의 상징으로 소비된다.

    이 과정에서 정원은 노골적인 차별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 대신 정원은 부드럽게 계층 감각을 학습시킨다. “이 정도의 삶은 가능해야 한다”는 기준을 암묵적으로 제시하며,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삶은 설명되지 않는다. 이 불편함은 그래서 더 강하다. 인스타그램 속 정원은 차별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차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이미지가 된다. 정원은 더 이상 자연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회적 위치를 감각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불편함은 정원이 아니라 소비 방식에서 비롯된다

    인스타그램 속 정원이 불편한 이유는 정원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정원이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는가에 있다. 정원이 이미지로만 소비될 때, 우리는 정원을 관계가 아니라 비교 가능한 결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정원이 과정으로 기록될 때, 실패와 변화가 함께 드러날 때, 정원은 다시 삶의 공간으로 돌아온다.

    흙 묻은 손, 시든 식물, 다시 심는 장면은 완성된 사진보다 덜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장면들이 정원의 본질에 가깝다. 인스타그램 속 정원이 불편하다는 감각은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정원이 원래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정원은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살아내기 위한 공간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을 때, SNS 시대의 정원은 다시 이미지에서 관계로, 소비에서 삶으로 이동할 수 있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인스타그램 속 정원은 기억을 남기지 않는다

    정원은 본래 기억의 공간이다. 어떤 해에 무엇이 잘 자랐는지, 어느 계절에 무엇을 잃었는지, 어떤 실패가 다음 선택을 바꾸었는지가 정원에는 축적된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은 흙의 상태만 보아도 지난 시간을 떠올리고, 한 그루의 나무를 통해 자신의 삶의 한 시기를 기억한다. 그러나 인스타그램 속 정원은 이러한 기억을 남기지 않는다. 이미지는 늘 ‘지금’만을 가리키며, 이전과 이후는 잘려 나간다. 정원은 축적의 장소가 아니라, 순간의 쇼케이스가 된다.

    이때 불편함은 정원이 삶의 기억을 담지 못하게 된다는 데서 온다. 인스타그램의 피드는 빠르게 갱신되고, 오래된 정원 사진은 묻힌다. 정원이 가진 시간의 층위, 즉 실패의 흔적과 회복의 기록은 알고리즘의 속도에 밀려 사라진다. 정원이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 공간이 될 때, 우리는 정원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잃는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인스타그램 속 정원은 아름답지만, 기억을 허락하지 않는 공간이기에 불편하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불편함은 SNS 시대에 정원을 지키려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인스타그램 속 정원이 불편하다는 감각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나 부정적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정원이 원래 지녔던 의미—시간, 돌봄, 실패, 관계—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신호일 수 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정원이 이미지로만 소비될 때, 정원은 더 이상 우리 삶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이 불편함은 정원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정원을 지키려는 감각에 가깝다.

    SNS 시대에 정원을 완전히 이미지 소비에서 분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원을 어떻게 기록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완성된 결과만을 올릴 것인지, 아니면 망한 화분과 다시 시작하는 과정을 함께 남길 것인지. 인스타그램 속 정원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 감각을 없애려 애쓰기보다 질문으로 바꿔볼 수 있다. 우리는 정원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가, 그리고 무엇을 살아내고 싶은가. 이 질문을 놓치지 않는 한, SNS 시대의 정원은 완전히 소비되지 않고, 여전히 삶의 공간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