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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정원은 왜 여성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나

📑 목차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정원=여성”이라는 인식은 자연스럽지 않다

    정원이 여성의 공간으로 인식되는 현상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사실 그것은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사회적 배치의 결과다. 정원은 본래 특정 성별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왕과 귀족의 정원, 사찰·궁궐의 정원, 도시공원, 공동체의 텃밭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주체가 만들고 사용했다. 그럼에도 근대 이후 ‘정원 가꾸기’가 특히 여성성과 결합해 인식되는 이유는, 정원이 단지 식물을 키우는 곳이 아니라 노동·돌봄·가정·교양·소비 같은 사회 제도와 강하게 연결되어 왔기 때문이다.
    핵심은 이렇다. 사회는 오랫동안 여성을 “돌보고 꾸미고 유지하는 사람”으로 배치해 왔고, 정원은 그 역할이 가장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그러므로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정원은 왜 여성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나”는 질문은 결국 “어떤 일이 여성의 일이 되었고, 왜 그 일이 정원을 통해 드러났나”라는 질문과 같다.

     

    정원 사회학의 시선으로 본 정원 인플루언서, 왜 여성 중심인가
    정원 사회학의 시선으로 본 정원 인플루언서, 왜 여성 중심인가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가정의 영역과 돌봄 노동이 정원을 여성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정원이 여성과 결합되는 가장 강력한 고리는 가정(사적 영역)이다. 근대 도시 사회에서 ‘남성은 공적 영역(경제·정치·노동시장), 여성은 사적 영역(가정·양육·돌봄)’이라는 분리가 강화되면서, 집 주변의 공간—마당, 부엌 옆 텃밭, 현관 앞 화단—은 자연스럽게 여성의 책임 범위로 묶였다. 정원은 집의 연장선에 놓였고, 집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정원도 함께 맡게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원 활동이 단순히 ‘예쁜 꽃을 키우는 취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정원에는 물 주기, 잡초 제거, 병해충 관리, 계절별 정리 같은 반복적이고 보이지 않는 노동이 포함된다. 이런 노동은 사회적으로 종종 ‘일’로 인정받지 못하고 ‘집안일’처럼 취급되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정원은 여성의 돌봄 노동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결과가 즉각적이지 않고, 티가 잘 나지 않으며, 잘 유지되면 “원래 그런 상태”처럼 보이는 일. 가정의 청결 유지나 아이 돌봄처럼 정원 역시 성공하면 평가받지 못하고 실패하면 책임이 돌아오는 노동이 되기 쉽다.
    따라서 정원이 여성의 공간으로 인식된 이유는 “여성이 자연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정원이 사회적으로 돌봄의 책임이 배정된 영역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정원은 사적 공간의 품질을 높이고 가족의 일상을 부드럽게 만드는 장치로 읽혔고, 그 임무가 여성의 역할로 연결되며 ‘정원=여성’이라는 문화적 등식이 강화되었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교양’과 ‘단정함’의 규범이 정원을 여성성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정원은 단지 노동의 공간이 아니라 품위와 교양의 전시장으로도 기능해 왔다. 특히 18~20세기 서구 중산층 문화가 확산되면서, 집과 정원은 한 가족의 도덕성과 생활 수준을 보여주는 무대가 됐다. 잘 정돈된 앞마당, 계절에 맞춘 꽃, 관리된 잔디는 ‘근면하고 질서 있는 가정’의 상징으로 작동했다. 그리고 그 가정의 질서와 단정함을 유지하는 책임은 많은 사회에서 여성에게 배정되었다.
    영국의 코티지 가든이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삶”의 상징이 된 과정도 이런 맥락과 닿아 있다. 원래 코티지 가든은 생계형 혼합 식재(채소·허브·꽃)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상화된 전원 이미지가 되었고, 그 정원 이미지는 곧 “정갈한 살림, 따뜻한 가정, 손길이 닿은 생활”의 상징으로 재해석되었다. 이때 ‘손길’은 종종 여성의 손길로 상상되었다.
    동아시아에서도 유사한 메커니즘이 있다. 가정 내부의 화초, 분재, 작은 화단은 ‘집안의 품격’과 연결되기 쉬웠고, 그 품격 관리가 여성의 역할로 기대되곤 했다. 한국에서도 집안 화분이나 베란다 식물 관리가 오랜 기간 “주부의 취미”처럼 호명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원은 여성에게 ‘자연을 사랑하는 감성’의 증거로 요구되기도 했고, 동시에 가정을 꾸미는 능력을 드러내는 교양의 표시가 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정원은 여성성이 사회적으로 요구받는 장(場)이 되었고, 그 요구가 반복되며 인식이 굳어졌다.

     

     

    정원 사회학으로 보는 다양한 문화 사례: “여성의 정원”은 한 가지 모습이 아니다

    정원이 여성의 공간으로 인식되는 방식은 문화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곳에서는 여성에게 정원이 ‘허용된 활동’이었고, 어떤 곳에서는 정원이 여성의 역할을 ‘강화하는 장치’였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정원이 여성의 사회 참여의 통로가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유럽의 수도원·약초원 전통에서는 여성 수도자들이 약용 식물과 치유를 다루며 정원 지식을 축적한 사례가 있다. 약초와 식물 지식이 돌봄(치료)과 결합되면서 여성의 역할과 맞물렸고, 이때 정원은 단순한 미적 공간이 아니라 돌봄의 기술이 축적되는 장소가 된다. 반면 귀족·왕실 정원에서는 설계와 권력이 남성 중심으로 기록되었지만, 실제 유지와 장식의 영역은 여성의 취향과 가사 인력의 노동이 크게 관여했다. 즉 “누가 정원의 이름을 남겼는가(권력)”와 “누가 정원을 일상적으로 유지했는가(노동)”가 분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시아에서도 ‘실내·근거리 자연’이 여성과 결합되는 방식이 두드러진다. 집 주변의 작은 화단, 뜰, 화분 문화는 외부 활동이 제한된 상황에서 여성에게 상대적으로 접근 가능한 자연 경험이 되곤 했다. 이때 정원은 자유의 공간이기보다 허용된 범위 안에서의 자연이 된다. 동시에 오늘날에는 공동체 정원이나 도시 텃밭에서 여성 참여가 높게 나타나는데, 이는 정원이 돌봄·교육·식생활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와 함께하는 활동, 지역 먹거리, 건강한 생활이라는 프레임이 정원을 여성의 영역으로 다시 불러오는 셈이다.
    그러나 중요한 반례도 있다. 일본의 전통 정원 관리 분야, 궁궐·사찰 정원 운영, 대규모 조경 시공 같은 영역은 오랫동안 남성 중심의 직업적 영역으로 형성되어 왔다. 즉 ‘정원’이라는 말 아래에는 서로 다른 층위(가정 원예 / 공공정원 / 전문 조경)가 있고, 이 층위에 따라 젠더 구성이 달라진다. 우리가 흔히 “정원은 여성의 공간”이라고 말할 때 가리키는 것은 대개 가정 원예와 생활정원에 가까우며, 그 범위 안에서 여성성이 강화되어 왔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근대 이후 소비와 미디어가 ‘여성의 정원’ 이미지를 고정했다

    정원이 여성의 공간으로 굳어지는 데에는 시장과 미디어의 역할이 매우 컸다. 원예 산업이 성장하면서 씨앗, 화분, 인테리어 식물, 정원 소품이 대량으로 판매되었고, 광고와 잡지는 주요 소비자 집단을 ‘가정의 관리자’로 상정했다. 많은 사회에서 그 역할은 여성에게 돌아갔다. 그 결과 정원은 돌봄과 소비가 결합된 영역이 되었고, 여성은 “사고, 꾸미고, 유지하는 주체”로 호명되었다.
    TV 프로그램과 잡지 화보 속 정원도 비슷한 기능을 했다. 정원은 ‘힐링’ ‘감성’ ‘집안의 분위기’ 같은 언어로 포장되었고, 그 언어는 여성성을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이미지가 반복되면, 정원 가꾸기는 점점 ‘여성에게 어울리는 활동’으로 학습된다. 반대로 남성이 정원 활동을 할 때는 ‘특별한 취미’, ‘전원생활의 로망’, ‘은퇴 후 여유’처럼 다른 프레임이 붙기도 한다. 같은 행위가 성별에 따라 다른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다.
    SNS 시대에는 이 경향이 더 정교해진다. 예쁜 정원 사진은 라이프스타일의 증거가 되고, 돌봄과 감성의 언어는 더 쉽게 확산된다. 정원은 자연과 관계 맺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나의 삶은 이렇게 단정하고 감각적이다’라는 정체성 전시의 도구가 된다. 이때 여성성은 때로는 강화되고, 때로는 저항의 대상으로 드러난다. 누군가는 정원을 통해 돌봄의 능력을 칭찬받고, 누군가는 그 칭찬이 사실상 또 다른 기대와 부담임을 깨닫는다.

     

     

    맺은 말: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여성의 정원’이라는 인식은 가능성을 열 수도, 역할을 가둘 수도 있다

    정원이 여성의 공간으로 인식된 이유는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적 영역의 젠더 분업, 돌봄 노동의 구조, 교양과 단정함의 규범, 원예 산업과 미디어의 재현이 겹치며 만들어진 결과다. 정원은 여성을 자연에 가깝게 만든 것이 아니라, 사회가 여성에게 배정한 역할—돌봄, 유지, 꾸밈—을 정원이라는 공간에 투사하며 여성과 정원을 결합시켜 왔다.
    다만 이 인식은 양면적이다. 어떤 여성에게 정원은 ‘가정의 의무’가 아니라 자기 시간을 되찾는 통로가 될 수 있고, 공동체 정원은 여성의 사회 참여를 확장하는 장이 되기도 한다. 반대로 정원이 여성의 공간으로만 고정될 때, 정원은 다시 여성에게 “좋은 집, 좋은 엄마, 단정한 생활”의 기준을 요구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정원이 여성의 공간인가”가 아니라, “정원이 누구에게 어떤 조건으로 열려 있는가”다. 정원이 돌봄과 관계, 느린 시간을 회복하는 인프라가 되려면, 정원 활동이 특정 성별의 역할로 고정되지 않도록 돌봄의 책임과 여유의 권리가 사회적으로 재배치되어야 한다. 정원이 여성의 공간으로만 남지 않고 모두의 생활 문화가 되기 위해서는, 정원을 둘러싼 역할과 기대를 함께 바꾸는 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