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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꾸기’라는 행위는 흙을 만지고, 식물을 심고, 돌보는 단순한 동작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사회와 관계, 정체성과 의미가 촘촘히 엮여 있다. 정원에서의 ‘가꾸기’는 개인의 취미를 넘어, 한 사회가 자연과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중요한 실천이다. 이 글에서는 가꾸기를 사회학적으로 바라보며, 다양한 사례를 통해 그 안에 숨어 있는 문화적·사회적 함의를 탐구해 본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가꾸기’라는 행위는 무엇을 말하는가
가꾸기는 단순히 “뭔가를 예쁘게 만드는 것”을 넘어선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가꾸기는 시간을 들여 돌보고, 유지하고, 개선하는 행위이며,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과 세계를 동시에 변형시킨다. 정원은 이 가꾸기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첫째, 가꾸기는 미래를 전제하는 행위다. 씨앗을 심는 사람은 당장의 결과가 아닌 “나중에 올 시간”을 기다릴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둘째, 가꾸기는 관계의 행위다. 식물은 혼자서 잘 자라지 않고, 햇빛·물·흙·사람의 손길이 어우러져야 생장이 이루어진다.
셋째, 가꾸기는 가치의 표현이다. 무엇을 심고, 어떻게 가꾸느냐에는 그 사람과 그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미학, 윤리, 규범이 반영된다.
그래서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정원 가꾸기를 들여다보면, 단지 “무엇을 심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시간을 살고 있으며, 누구와 어떻게 관계 맺고 싶은가”가 드러난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가정 정원에서 드러나는 일상
가정집 앞마당이나 베란다에 놓인 작은 화분들도 사회학의 관점에서 보면 의미가 풍부하다. 특히 도시 생활에서 정원이나 화분을 가꾸는 행위는 일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자신을 돌보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예를 들어, 맞벌이 부부가 사는 아파트 베란다에 작은 허브 텃밭이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출근 전 잠깐 물을 주고, 퇴근 후 시들지 않았는지 살피는 행위는 바쁜 도시 리듬 속에서 “멈춤의 시간”을 만들어낸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가꾸기는 단지 식물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하루를 조율하고 정체성을 확인하는 실천이 된다.
어떤 사람은 관엽식물을 여러 개 키우면서 “내 공간은 편안하고 초록이 많은 곳이어야 한다”는 자기 이미지를 구축한다.
또 다른 사람은 허브와 채소 위주로 심으며 “조금 불편해도 직접 키운 것을 먹고 싶다”는 가치관을 드러낸다.
이처럼 가정 정원에서의 가꾸기는 개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세계관을 구체적인 공간으로 번역하는 행위다. 동시에 집에 방문한 손님들 역시 그 정원을 보며 그 사람의 성격·취향·삶의 방향을 읽어낸다. 정원은 말 없는 자기소개서가 된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미국 교외 잔디밭: 가꾸기와 규범
미국 교외에 넓게 펼쳐진 잔디밭은 ‘가꾸기’가 어떻게 사회적 규범과 압력으로 변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20세기 중반 교외 주택 단지에서 앞마당 잔디를 고르고 짧게 유지하는 것은 “좋은 시민, 책임감 있는 중산층”의 상징이 되었다.
잔디를 잘 깎아 두는 행위는 성실성과 규율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반대로 잔디가 자라 잡초가 무성해지면, 그 집 주인은 “관리하지 않는 사람, 이웃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한 사람”으로 간주되기 쉽다.
여기서 가꾸기는 단지 개인 취향이 아니라, 이웃과 지역사회가 강요하는 행동 기준이 된다. 어떤 지역에서는 시 조례나 주택 소유자 협회 규정으로 잔디 관리 기준을 정해놓고, 이를 어기면 벌금을 물리기도 한다. 이웃이 “저 집은 왜 저렇게 방치하냐”며 신고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에는 이런 전통적 잔디 문화에 맞서는 생태 정원·토종 식물 정원 실천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일부 주민들은 잔디 대신 꿀벌을 위한 꽃과 토종 식물을 심으며 “환경을 생각하는 새로운 가꾸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이 기존 규범과 충돌하면서 갈등과 협상, 법적 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가꾸기 방식의 변화가 곧 사회 가치와 규범을 재협상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조선시대 선비들이 실천한 전통 정원에서의 ‘가꾸기’
한국의 전통 정원, 특히 조선 시대 별서정원(別墅庭園)은 ‘가꾸기’가 어떻게 삶의 태도와 학문적 실천과 연결되는지 잘 보여준다. 강진 백운동 원림처럼 산수(山水)와 함께 조성된 정원에서는 “손을 대되, 자연을 흉내 내지 않는다”는 원칙이 중요했다.
조선의 선비에게 정원을 가꾸는 일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수양과 성찰의 연장선이었다. 가지를 자를 때에도 “나무의 형세를 거스르지 말 것”, 돌을 놓을 때에도 “산의 맥을 끊지 말 것”이라는 기준이 있었다. 이런 가꾸기는 곧 “세상을 다루는 태도”와 연결된다.
자연을 억지로 구부리지 않고, 흐름을 따라 정리하는 태도.
인공의 미를 내세우기보다, 자연스러움과 어울림을 중시하는 미학.
이런 실천은 유교적 질서 속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인간상”을 몸으로 익히는 행위였다. 정원에서의 가꾸기는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벗을 맞이하는 일상과 이어지며 하나의 생활 철학을 형성했다. 오늘날 우리가 전통 정원을 방문할 때 느끼는 고요함과 안정감은, 사실 그곳을 가꿨던 사람들이 오랜 시간 쌓아온 실천의 흔적이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공동체정원: 함께 가꾸는 관계
최근 한국 여러 도시에서 늘어나고 있는 공동체 정원, 마을 텃밭은 ‘가꾸기’가 사람 사이의 관계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실천이라는 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방치된 공터를 주민들이 함께 정원으로 바꾸는 사례를 떠올려보자. 처음에는 “보기 좋게 꾸미자”라는 목표로 시작하지만, 실제로 중요한 변화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난다
매주 함께 모여 흙을 고르고, 모종을 나누어 심는다.
잡초를 뽑으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일상을 나누고,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
어떤 구역은 아이들이 맡고, 어떤 구역은 어르신들이 책임지는 등 역할과 책임이 생긴다.
이 과정에서 정원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쌓이는 공간이 된다. 신뢰, 상호 도움, 비공식적 네트워크 등이 흙 위에서 자라난다. 가꾸기라는 공동의 실천이 사람들의 마음을 느슨하게 연결하고, 갈등을 조정하며, “같이 사는 동네”라는 감각을 키워 준다.
또한 공동체 정원에서는 종종 의사결정의 민주성도 함께 가꾸어진다.
무엇을 심을지 투표하거나, 회의를 통해 정한다.
특정 사람이 모든 권한을 쥐고 결정하면 불만이 생기고, 조율 과정을 거치며 “함께 결정하는 법”을 배운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 정원의 가꾸기는 작은 규모지만, 민주주의와 협력의 연습장이 되기도 한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연결을 실천한 팬데믹 시대의 가꾸기
코로나19 팬데믹은 ‘가꾸기’라는 행위를 전 세계적으로 다시 부각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인간관계가 단절되면서 많은 사람이 식물을 키우고 정원을 돌보는 것에서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는 보고가 많다.
베란다 정원, 옥상 텃밭, 실내 반려식물 등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SNS에는 식물의 성장기를 공유하는 계정들이 “식물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이때 가꾸기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 불안과 우울을 다루는 방식이 되었다. 매일 일정 시간 물을 주고, 새 잎이 나는 것을 지켜보는 루틴은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시간 속에서도, 생명은 계속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는 곧 시간 감각과 삶의 리듬을 회복시키는 치유의 실천이다.
또한 팬데믹 상황에서 공동체 정원은 “거리 두기를 지키며 만날 수 있는 드문 공간”으로 기능했다. 마스크를 쓰고 서로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흙을 함께 만지고 식물을 나누는 과정은 “우리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경험을 제공했다. 정원에서의 가꾸기가 곧 사회적 고립을 완화하는 연결의 행위로 작동한 것이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가꾸기와 권력, 그리고 저항
가꾸기가 항상 따뜻하고 평화로운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앞서 본 미국 잔디 문화처럼, 때로 가꾸기는 규범을 강요하고, 계급을 드러내고, 차이를 통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잘 가꿔진 정원과 집 주변은 “이 지역은 관리가 잘 되는, 수준 있는 동네”라는 이미지를 준다.
반대로 정원이 없는 집, 혹은 잡초가 무성한 공간은 “문제가 있어 보이는 공간”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재개발 전 주민들이 오랜 시간 가꾸어 온 작은 정원과 화단이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철거되고, 대신 깔끔하지만 비인간적인 조경이 들어서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어떤 가꾸기는 가치 있게 평가되고, 어떤 가꾸기는 배제되는지를 살펴보면 그 사회의 권력관계가 드러난다.
그렇기에 최근에는 대안적 가꾸기 실천이 하나의 저항이 되기도 한다.
토종 식물을 심어 생물다양성을 지키려는 정원.
노숙인, 이주민, 장애인과 함께 가꾸는 포용적 정원 프로젝트.
도시의 자투리땅을 게릴라 가드닝으로 꽃밭으로 바꾸는 실천 등.
이러한 가꾸기들은 단순히 공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누가 이 도시의 구성원인가, 누구에게 공간과 존엄이 허락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회적 행동이기도 하다.
정원 사회학에서 배우는 가꾸기의 의미
정원에서의 가꾸기를 사회학적으로 바라보면, 그 안에는 적어도 네 가지 층위의 의미가 보인다.
개인적 층위
나 자신을 돌보고, 시간을 관리하며, 감정을 다스리는 자기 실천.
작은 성공과 실패(싹이 잘 나지 않거나, 예기치 못한 꽃이 피는 순간)를 통해 삶을 배우는 과정.
관계적 층위
가족, 이웃, 친구와 함께 가꾸면서 형성되는 신뢰와 협력.
세대 간, 계층 간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공통의 언어.
문화적 층위
어떤 식물을 심고, 어떤 디자인을 선호하는가에 담긴 사회의 미학과 가치관.
전통 정원과 현대 정원의 차이 속에 드러나는 시대정신..
구조적 층위
법, 제도, 경제적 여건이 가꾸기 방식에 미치는 영향.
누가 땅을 소유하고, 누가 접근할 수 있으며, 어떤 실천이 인정받는가를 둘러싼 권력관계.
정원에서 삽을 쥐고, 물뿌리개를 들고, 작은 모종을 심는 순간, 사람은 알게 모르게 이 네 층위를 오가며 사회 속에서 자신과 타인을 다시 위치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가꾸기는 그래서 작은 실천이지만, 깊은 사회학이다.
맺음말: 왜 지금, ‘가꾸기’의 사회학인가
기후 위기, 팬데믹, 도시 고립, 관계의 피로가 겹친 시대에 정원에서의 가꾸기가 다시 중요해지고 있다. 정원은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손과 몸으로 배우는 사회학의 교실이다. 흙을 만지며 우리는 속도를 늦추는 법을 배우고, 식물을 나누며 타인과 연결되는 기쁨을 기억하며, 서로 다른 가꾸기 방식을 존중하는 법을 익힌다.
‘가꾸기’라는 행위는 결국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떤 세계를 원하며, 그 세계를 위해 지금 무엇을 돌보고 있는가?”
정원에서 이 질문에 답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면, 그 실천은 분명 정원을 넘어 사회 전체를 조금씩 다르게 가꾸는 힘으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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