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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침묵 속의 언어
정원은 말이 없지만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곳에는 계절의 순환, 사람의 손길, 시대의 기억, 지역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쌓인다.
그래서 정원은 단순한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공간 속의 문화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정원은 일종의 이야기책이다.
식물의 종류, 돌의 배치, 물길의 흐름, 벤치의 위치 모두가 말없이 무언가를 전한다.
조경역사학자 존 딕슨 헌트(John Dixon Hunt)는 “모든 정원은 사회가 자신을 표현하는 한 편의 풍경적 서사”라고 했다.
즉, 정원은 자연을 사유하는 방식이자 인간이 자신과 사회를 해석하는 공간적 문학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은 한눈에 웅장하고 정교하다.
대칭적 구조, 길게 뻗은 수로, 인공의 질서는 “왕의 권력이 자연을 통제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 정원은 루이 14세가 꿈꾼 정치적 질서와 국가의 이성을 상징하는 정치적 서사였다.
정원은 말하지 않지만, 그 형태와 구조 자체로 사회의 신념과 시대의 욕망을 이야기한다.
자연 속에서 철학을 읽는 동양 정원
동양의 정원은 서사의 방식이 다르다.
여기서 정원은 명료하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백을 통해 묵시적 서사를 전달한다.
한국과 일본, 중국의 전통정원을 관찰해 보면,, 공간의 비움과 흐름이 하나의 철학적 문장으로 읽힌다.
조선 중기 처사 이담로(李聃老, 1627~1701)가 조성한 강진 백운동 원림은 대표적인 예다.
월출산 계곡을 배경으로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린 이 별서정원은, 관직을 버리고 은거 생활을 택한 이담로의 삶을 반영한다.
계곡 물을 끓어 상·하 연지를 만들고 화계를 자연스럽게 배치한 구조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은둔과 조화의 서사를 전한다. 담양 소쇄원, 완도 부용동정원과 함께 호남 3대 정원으로 꼽히며, 2019년 명승 제115호로 지정될 만큼 조선 선비들의 은거 문화를 생생히 보여준다.
일본 교토의 료안지(龍安寺) 정원 또한 언어 대신 침묵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하얀 모래 위에 검은 돌이 놓인 단순한 구성.
그 사이의 여백은 마치 마음속의 무한한 세계를 상징한다.
어떤 이는 그것을 섬과 바다로, 어떤 이는 인간의 사유로 해석한다.
이렇듯 동양의 정원은 확정된 메시지 대신 관조(觀照)와 사색의 여지를 남기는 열린 서사를 선택한다.
정원의 돌 하나, 나무 한 그루가 인간의 존재와 자연의 섭리를 함께 이야기하는 셈이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권력, 미학, 낭만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서양 정원
서양의 정원은 매우 다채로운 서사를 보여준다.
그 중심에는 사회적 질서, 미적 규범, 개인적 감정이라는 세 개의 서사가 얽혀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서는 빌라 데스테(Villa d’Este) 같은 정원이 만들어졌다.
이 정원은 인간이 신의 창조에 참여하는 존재라는 르네상스적 인간중심주의의 서사였다.
대칭 구조로 정돈된 나무, 인공 수로, 조각상은 인간 이성의 완벽함을 찬미한다.
17세기 프랑스에서는 베르사유 정원이 국가 권력의 상징으로 재창조되었다.
루이 14세는 “나는 국가다”라고 말했듯이,
정원을 통해 왕권의 질서, 절대적 통제, 문명의 완벽함을 공간에 새겼다.
그 정원은 단지 아름답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정치적 풍경의 선전 수단이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사회가 개인의 감정과 자유를 중요시하게 되자 정원의 서사도 바뀌었다.
19세기 영국의 풍경식 정원(Picturesque Garden)은 자연의 불규칙함을 의도적으로 모방한다.
길은 굽이치고, 나무들은 제멋대로 자란다.
이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느끼는 ‘낭만적 감정’의 공간적 표현이었다.
이 정원은 “통제된 질서”의 반대편에서 “자연스러운 조화”라는 새로운 문학을 썼다.
20세기에 이르러 영국과 미국의 공공정원은 민주주의 서사를 품게 된다.
공원이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민 모두의 쉼터가 되면서,
정원은 자유와 평등의 상징, 공동체의 이야기 공간으로 변신했다.
런던 하이드 파크나 뉴욕 센트럴 파크는 그 대표작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산책하고 음악회에 참여하며, 도시 속 삶의 서사를 공동으로 써 내려간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전통과 도시문화가 어우러진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한국 정원
오늘날 한국의 정원은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복합적 서사를 품고 있다.
전통적인 정원의 미학과 현대 도시의 문화가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사회적 이야기가 피어나고 있다.
서울 성수동의 ‘서울숲’이나 ‘용산 가족공원’은
공공정원을 통해 시민이 자연을 경험하고 공동체적 관계를 느끼는 도시 서사공간이다.
여기서 정원은 개인의 힐링을 넘어 사회적 회복의 무대가 된다.
사람들은 잔디밭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아이들은 풀잎을 쥐어 돌며 놀고,
아주 평범한 일상의 장면 속에서 정원은 공동체의 관계를 다시 엮는다.
또한 최근 전국적으로 확산된 ‘마을정원’ 운동은
정원을 통해 지역의 기억과 공동체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사례로 주목받는다.
서울 마포구, 부산 영도, 전주 완산구 등지에서는
주민이 직접 화단을 만들고 돌보며 골목을 녹색으로 바꿨다.
한 중년 참가자는 “이웃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게 정원 덕분이었다”라고” 말했다.
이 말속에는 정원이 말없이 전하는 ‘함께 살기’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러한 정원의 서사는 팬데믹 시기 더욱 확장되었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정원을 통해 다시 사람과 세상에 연결되었다.
옥상 텃밭, 베란다 화분, 공동체 정원이 모두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언어이자 치유의 이야기로 기능했다.
정원의 언어가 단지 시각적 아름다움을 넘어, 관계의 회복과 감정의 연대로 확장된 시기였다.
정원 사회학 관점에서 팬데믹 이후, 정원은 치유의 서사가 된다
팬데믹은 정원이 사회를 비추는 방식에 깊은 변화를 가져왔다.
격리와 불안 속에서, 사람들은 ‘식물 돌보는 일’을 새로운 대화의 방식으로 삼게 되었다.
하루 몇 번 물을 주고, 잎사귀의 색을 관찰하고, 작은 새싹을 기다리는 그 느림 속에서
인간은 잊고 있던 ‘돌봄의 리듬’을 되찾았다.
서울의 한 아파트 공동체 정원에서는 팬데믹 기간
이웃들이 마스크를 쓴 채 거리 두기를 유지하며 텃밭을 함께 가꾸었다.
비록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했지만, 식물은 그들 사이의 매개가 되었다.
어떤 참가자는 “같이 고추를 심고 물주던 그 시간이 유일하게 외롭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정원은 그렇게 말 없는 위로와 공감의 언어로 변신했다.
이 현상은 세계적으로도 관찰되었다.
영국의 연구기관 로열 호티컬처럴 소사이어티(RHS)의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정원 가꾸기에 참여한 인구가 40% 증가했으며,
응답자 상당수가 “정원을 통해 불안감이 줄었다”라고” 말했다.
정원은 그 자체로 정신적 치유의 공간, 사회적 회복의 이야기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제 정원은 단순히 식물을 바라보는 공간이 아니라,
사회가 다시 관계를 배우는 생활 속 이야기의 장이 되었다.
정원에서 피어나는 서사학
정원은 단지 조경의 결과물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가 쓴 하나의 텍스트이다.
그 안에는 시대의 가치, 인간의 감정, 기술, 정치, 예술이 함께 엮여 있다.
이런 면에서 정원은 ‘사회적 서사학(social narrative)’의 현장이다.
브루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이론(ANT)을 떠올려보면,
정원은 인간과 비인간이 협업해 만들어낸 복합적 이야기다.
식물, 흙, 물, 햇빛, 곤충, 사람, 제도가 모두 행위자이자 서사 자다..
정원의 서사는 인간 중심이 아니라 공생의 대화체로 쓰인다.
한국의 한 공동체 정원에서 벌, 나비, 아이, 노인이 함께 어울리는 광경은
“사회가 자연과 함께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는 장면이다.
이처럼 정원은 인간의 언어로 쓴 문장이 아니라, 햇빛과 바람으로 쓰인 자연의 문장이다.
정원이 들려주는 이야기
정원은 시대마다 다른 언어로 사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중세에는 신의 질서, 근대에는 권력과 문명,
산업화 이후에는 낭만과 민주주의,
그리고 지금은 치유와 공존의 이야기를 전한다.
결국 정원은 한 사회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드러내는 거울이다.
그 안에서 인간은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을 만나며, 자연과 대화를 나눈다.
눈에 보이는 잎사귀 하나하나, 바람에 흩날리는 향기 속에도 문화의 문장, 사회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오늘 우리가 가꾸는 모든 정원은 미래세대에게 하나의 이야기책으로 남을 것이다.
그 책의 주제는 아마도 이렇게 요약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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