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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사회학과 돌봄의 윤리 - 생명과의 관계를 다시 묻다

📑 목차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흙을 다루고 식물을 키우는 기술을 넘어, “어떻게 생명을 대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매일 마주하는 일이다. 정원 사회학의 관점에서 보면 정원은 인간 중심의 편의를 위해 꾸며진 장식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시험해 보는 윤리적 실험실이다. 이 글에서는 정원 사회학을 통해 정원과 돌봄의 윤리를 다시 묻고, 생명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지 생각해 본다.

     

    정원 사회학과 돌봄: ‘예쁘게가 아니라 살게하는 일

    정원 사회학이 보는 돌봄은 단순한 관리가 아니라 관계 맺기다. 많은 사람이 정원을 이야기할 때 예쁘게 꾸미는 것을 먼저 떠올리지만, 돌봄의 윤리에서 정원의 핵심 질문은 이 존재가 잘 살고 있는가?”에 가깝다. 물을 주고, 가지를 치고, 화분을 옮기는 일 하나하나에 생명에 대한 태도가 드러난다.

     

    정원 사회학은 이 돌봄을 세 가지 층위로 본다.

     

    식물과 토양, 곤충 같은 비인간 존재에 대한 돌봄

     

    이 공간을 함께 쓰는 사람들에 대한 돌봄

     

    정원을 돌보는 자기 자신에 대한 돌봄

     

    이 세 층위가 함께 작동할 때, 정원은 누군가의 노동만 소모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생존과 안정을 지지하는 장소가 된다. 정원 사회학은 얼마나 많은 식물을 키우느냐보다 얼마나 책임 있게 돌보고 있느냐에 주목한다.

     

    정원 사회학과 돌봄 ‘예쁘게’가 아니라 ‘살게’ 하는 일
    정원 사회학과 돌봄: ‘예쁘게’가 아니라 ‘살게’ 하는 일

     

    정원 사회학으로 본 잡초와 해충: 없애야 할 대상인가, 함께 살 대상인가

    정원 사회학이 자주 다루는 주제 중 하나가 잡초해충을 대하는 태도다. 특정 식물을 기준으로 나머지를 잡초라 부르고, 인간에게 피해나 불편을 준다는 이유로 어떤 생물을 해충이라 부르는 순간, 이미 강한 위계가 만들어진다. 돌봄의 윤리는 여기서부터 다시 묻기 시작한다.

     

    정원 사회학적 관점에서 잡초와 해충은 제거 대상이 아니라 관계 조정의 상대다.

     

    토종 식물이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뽑혀 나가고, 외래종 관상수만 남을 때, 정원은 지역 생태계와 점점 멀어진다.

     

    모든 곤충을 없애려 살충제를 사용하면, 해충뿐 아니라 정원의 균형을 지탱하던 다른 생명도 함께 사라진다.

     

    돌봄의 윤리에서 정원 사회학은 완전히 깨끗하고 통제된 정원대신, 어느 정도의 혼재와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정원을 긍정한다. 상추 잎에 난 작은 구멍은 실패가 아니라, 함께 먹고 있는 누군가가 있음을 알려주는 흔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통제냐 방치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어느 선까지 함께 살 수 있을지를 계속 조정해 가는 태도라고 정원 사회학은 말한다.

     

       

    정원 사회학과 동물 돌봄: 고양이··곤충과의 공존 실험

    정원에는 식물뿐 아니라 다양한 동물이 드나든다. 길고양이와 새, 벌과 나비, 개미와 지렁이까지. 정원 사회학은 이 동물들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정원의 윤리 수준을 보여준다고 본다.

     

    예를 들어,

     

    새를 부르고 싶어 먹이통을 달았지만, 동시에 떨어지는 배설물과 소음 문제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길고양이가 화단을 화장실처럼 쓰지 않도록 막으면서도, 존재 자체를 쫓아내지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벌을 부르는 꽃을 심으면서, 벌을 무서워하는 사람과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을 어떻게 배려할 것인가.

     

    정원 사회학은 이 질문들을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본다. 돌봄의 윤리에서는 한 존재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완전히 배제하는 방식보다, 여러 생명이 공존할 수 있는 설계와 규칙을 만들어 가는 시도가 중요하다. 새가 머무를 수 있는 나무와 사람을 위한 휴식 공간, 동물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와 이웃을 배려하는 경계가 함께 고민되는 곳, 그곳이 정원 사회학이 꿈꾸는 돌봄의 정원이다.

     

     

    정원 사회학의 눈으로 본 물과 흙: ‘자원이 아니라 함께 쓰는 기반

    정원을 손질할 때 물과 흙은 종종 당연하게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정원 사회학은 물과 흙을 단순한 자원이 아니라 돌봄의 윤리가 가장 직접적으로 작동하는 기반으로 본다.

     

    : 호스로 한 번에 쏟아붓는 방식과 빗물을 모아 나누어 쓰는 방식의 차이는, 정원 사회학적으로 전혀 다르다. 앞의 방식이 순간의 편리, 뒤의 방식이 장기적 공존을 상징한다.

     

    : 한 번 쓰고 버리는 흙과 퇴비·낙엽·잔가지가 계속 섞이며 살아 있는 토양으로 변화된 흙도 마찬가지다. 정원 사회학은 쓰레기로 버려지는 유기물을 다시 토양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인간과 토양 미생물 사이의 돌봄 관계로 이해한다.

     

    돌봄의 윤리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쓰는가가 아니라 어떤 순환 구조를 만들고 있는가. 정원 사회학은 물··영양분이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 사라지는 구조가 아닌지, 다시 생명으로 돌아오는 고리를 만들고 있는지 묻는다.

     

     

    공동체 정원 사회학과 돌봄: ‘누가 얼마나 돌보고 있는가의 문제

    혼자 가꾸는 정원과 여러 사람이 함께 가꾸는 공동체 정원에서는 돌봄의 윤리가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정원 사회학은 공동체 정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포착한다.

     

    항상 나오는 사람과 가끔 나오는 사람, 거의 나오지 않는 사람 사이에 돌봄의 부담은 어떻게 나뉘는가.

     

    물을 많이 주고 싶은 사람과 최소한만 주고 싶은 사람의 기준 차이는 어떻게 조정되는가.

     

    수확물을 누가 얼만큼 가져가는 것이 공정하다고 느끼는가.

     

    이 질문들은 모두 정원 사회학과 돌봄의 윤리가 만나는 지점이다. 공동체 정원에서 돌봄의 윤리는 동등하게 나누는 것기여한 만큼 나누는 것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는다. 어떤 정원 사회학적 사례에서는,

     

    기본 몫은 모두에게 같게 나누고,

     

    추가 노동을 한 사람에게는 조금 더 가져갈 수 있는 선택권을 주며,

     

    전혀 참여하지 못한 이웃에게는 일정 비율을 나눔 몫으로 떼어 두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정원 사회학이 볼 때 이런 합의 과정 자체가 돌봄의 윤리 교육이다. 식물 돌봄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감정과 에너지 배분이, 공동체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일과 돌봄의 균형: 정원 사회학이 말하는 번아웃 없는 정원

    정원을 돌보는 일이 어느 순간 부담과 의무로만 느껴질 때, 돌봄의 윤리는 왜곡되기 시작한다. “이 정원은 나 없으면 안 돌아가라는 생각이 강해지면, 정원은 돌봄의 공간이 아니라 자신을 소진시키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정원사회학은 여기서 돌봄의 윤리를 사람에게도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원의 모든 일을 혼자 떠안지 않고 적절히 나누는 구조를 만들기.

     

    물 주기·잡초 뽑기 같은 반복 노동을 한두 사람에게 고정하지 않기.

     

    이번 달은 좀 쉬어도 된다는 여유를 서로 허락하는 분위기 만들기.

     

    정원 사회학적으로 건강한 돌봄은, 돌봄 제공자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구조까지 포함한다. 정원은 언제까지나 나를 돌보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내가 돌보는 공간이어야 한다. 이 균형이 깨질 때, 정원은 쉽게 버려지거나, 돌봄이 폭력적인 통제로 변질될 수 있다.

     

     

    정원 사회학과 교육: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정원교육은 흔히 자연 사랑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정원 사회학의 관점에서 정원교육은 돌봄의 윤리를 몸으로 배우는 과정이다. 아이들이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실패를 경험하는 모든 과정이 정원 사회학적으로는 사회적 학습이다.

     

    정원교육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식물이 죽었을 때, “네가 잘못해서야라고 말할 것인가, “어떤 조건이 부족했을까?”라고 함께 분석할 것인가.

     

    해충이 생겼을 때, 무조건 나쁜 것으로 규정할 것인가, “왜 이 식물에 이 곤충이 왔을까?”를 먼저 관찰할 것인가.

     

    빨리 자라는 식물만 성공으로 칠 것인가, 늦게 자라도 끝까지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을 칭찬할 것인가.

     

    정원 사회학은 이런 선택들이 아이가 생명을 바라보는 시선을 형성한다고 본다. 돌봄의 윤리는 정원 안에서만이 아니라, 친구·가족·동물·환경과 관계 맺는 방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정원에서 배운 정원 사회학적 감수성은, 타인의 속도를 이해하고, 실패를 허용하고, 책임을 나누는 태도로 확장될 수 있다.

     

     

    기후위기 시대의 정원 사회학: 돌봄의 윤리를 지구적 차원으로

    기후위기 시대에 정원을 돌보는 일은 더 이상 개인 취미의 문제가 아니다. 정원 사회학은 정원이 작은 지구의 축소판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어떤 식물을 선택하는지, 물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비닐과 플라스틱을 얼마나 쓰는지, 화학 비료와 농약을 쓸 것인지 등이 모두 지구적 돌봄의 윤리와 연결된다.

     

    정원 사회학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기후변화로 사라져 가는 토종 식물을 정원에 들이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물 부족과 폭염이 심해지는 시대에, 물을 많이 요구하는 잔디 대신 다른 대안을 고르는 것은 어떨까.

     

    생분해되지 않는 플라스틱 화분과 장식품 대신, 오래 쓰고 고칠 수 있는 재료를 선택하는 것이 정원 사회학적 돌봄에 어떤 기여를 할까.

     

    이 질문들은 정원을 예쁜 나만의 공간에서 지구와 연결된 실천의 공간으로 바꾸는 정원 사회학적 전환이다. 돌봄의 윤리는 가까운 생명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더 넓은 생태계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정원 사회학이 남기는 질문: 누구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

    정원과 돌봄의 윤리를 정원 사회학의 시선으로 따라가다 보면, 결국 두 가지 질문이 남는다.

     

    정원에서 누구를 돌보고 있는가? (식물, 동물, 사람, 자신, 토양, )

     

    그 돌봄을 어떻게 실행하고 있는가? (통제, 방치, 협력, 조정, 나눔)

     

    정원 사회학은 잘 자라는 정원보다 잘 관계 맺는 정원에 관심을 둔다. 돌봄의 윤리는 완벽하게 정답이 주어진 규칙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과 조정 속에서 조금씩 만들어 가는 방향에 가깝다. 어떤 날은 물을 덜 주고, 어떤 날은 스스로를 위해 물 주기를 미루는 선택도 필요하다.

     

    정원 사회학적으로 건강한 정원은,

     

    생명들의 속도를 일방적으로 끌어 올리기보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마련하려 애쓰는 곳이다.

     

    정원을 가꾸며 돌봄의 윤리를 고민하는 일은, 결국 어떤 인간으로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흙과 잎, 벌레와 새, 이웃과 자신을 함께 떠올리는 순간, 정원은 더 이상 취미의 공간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연습하는 교실이 된다. 정원 사회학은 그 교실 한가운데서 조용히 묻는다.

     

    당신의 정원에서, 오늘 당신은 누구를 어떻게 돌보고 있는가?”